궁궐 이야기

운현궁에서....

쉰세대 2021. 7. 13. 12:26

운현궁은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임금이 되기 전 살았던 집으로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10년간 집정을 하면서

어린 고종 대신해서 정치를 했다.

서운관이 있던 고개의 이름을 따서 "운현궁"이라고 불렀다.

운현궁을 가기 위해 종로 3가를 지나는 길에 송해 길이 있다.

연세 드신 분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송해 선생.

이 나이 되도록 건강하고 돈 벌고 방방곡곡 다니며 맛난 음식 먹고...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전국으로 못 다니시겠네..

 

인사동을 지나니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 " 서울 교동초등학교"가 있다.

 

운현궁 도착,

입장료는 무료, 휴관일은 월요일...

 

 

 

운현궁은 지정번호 사적 제257호이다.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은 사대부집이라기보다 궁궐 내전에 가깝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뒤 큰아들을 거쳐 손자에게 상속되었어나

한국전쟁 후 상당 부분이 팔리면서 규모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수직사,

운현궁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대원군의 권력이 커지자 경호가 필요해서 궁에서 운현궁으로 군졸을 파견했다.

운현궁을 지키는 수하들이 사용했다.

 

난 "수직사"라고 해서 사찰 이름인 줄 알았다..

 

수직사 내부 모습.

먼저 "노안당"으로 들어갔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의 거쳐였다.

노안은 논어에서 구절에서 따온 "노인을 공경하고 편안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대원군이 서예를 하는 방을 재현한 거 같다.

 

노안당 마루에서 본 정원.

여러 가지 수석으로 장식이 되어있고 큰 나무와 돌담이 멋스럽다.

 

아주 넓은 대청마루.

 

다음은 "노락당"으로..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 가장 중심의 건물이다.

1866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이곳에서 올렸으며 

주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를 열렸던 곳이다.

내 친구 딸도 이곳에서 전통혼례를 치렀다.

 

안채답게 부엌이 정갈하다.

 

부대부인 여흥 민 씨가 아들 고종이 가례를 치르기 전에 거쳐하였던 곳이다.

 

다른 부엌에 떡메와 떡판도 있다.

 

노락당 앞마당,

20년 전 친구의 딸이 이곳 노락당 앞마당에서 전통 혼례를 올려서

처음으로 이곳에 와 봤다.

그땐 이 마당이 엄청 크게 느껴졌다.

 

노락당 정원,

노락당을 지나 이로당으로 가는 문..

 

밖에서 본 이로당 담장이 너무 예쁘다.

 

"이로당.."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고 적혀있다.

이로(二老)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 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이 된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 이후 운현궁을 방문할 때 노락당을 사용하였어니

 안채가 필요해서 뒤늦게 고종 6년에 이로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당 앞마당.

뒤쪽으로 나가는 문.

 

이로당 뒤쪽에 있는 비석.

가운데 글을 해석을 못하겠다.

 

이로당 건물 뒤쪽에 있는 골목.

건물이 이렇게 높아 사다리까지 두고 오르내렸나 보다.

주로 시녀들이 다녔겠지..

한복을 입고 오르내리기가 힘들었겠다.

 

이제는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갔다.

 

맨 처음 만나는 이하응 흥선대원군 초상화.

오래되어 얼굴을 잘 안 보인다.

 

이곳에 전시되어있는 유물들은 복제품이고 

실제 유물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고 한다.

 

 

안내서를 보니 

운현궁은 대원군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역이 형성이 되고 

확장이 되고 축소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운현궁은 고종이 즉위한 후 대대적으로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대원군家가 운현의 터를 잡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고종이 즉위 이전부터 운현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고 

현재의 경운동에서 고종이 태어난 후 옮겨온 것으로 판단한다.

"고종실록"애 따르면 고종 즉위 직후 대왕대비가 대원군의 우대조치로

토지와 재택의 신축과 수리를 지시하며 확장되었다고 한다.

고종 1년에 노안당과 노락당이,

고종 6년에 이로당이 건립되면서 운현궁이라고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대원군이 쇄국 정치를 하지 않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나라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참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인물이 대원군 이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