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방방곡곡

쉬멍 놀멍 제주여행....22, ( 4월 3일, 오후,추사 김정희 박물관,)

쉰세대 2022. 7. 9. 23:55

안덕 계곡에서 버스를 타고 보성 초등학교 근처에서 하차하여 점심을 먹고 

그곳에서는 그리 멀지 않으니까 슬슬 구경하며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마늘이 많이 생산이 되는 거 같다.

넓은 마늘 밭.

 

넓게 펼쳐진 유채밭,

 

이때는 감나무 잎이 아직 어리다.

3개월이 지났으니 지금쯤 작은 감이 달려있을 것이다.

 

조금 전 마늘 밭을 모았는데 마늘이 많은 곳이라 마늘 조형물도 있다.

 

추사관 도착.

 

세한도 그림 속의 집 모양으로 지은 추사관.

 

추사관은 지하에 있다.

 

 

                           " 완당 선생 해천일립상, "

추사의 제자 허련이 제주에 유배 중인 스승 추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추사를 처연하면서도 탈속한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략...

해설문 중에서,

 

                                 " 수선화부 "

1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가 평소 사랑했던 꽃 수선화에 대한 작품을 옮겨 적은 것을

제자 허련이 판각하여 탁본했다. 설명문 중에서...

 

                               "무량수각"

예산 화암사의 무량수불 ( 아미타불 )을 모시는 불당.

추사 가문의 원찰이었던 화암사가 수리되자 써 보낸 글씨,

 

                                 " 의문당"

의심 나는 것을 묻는 집,

 

세한도가 일본인 후지스카 치카시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님이 일본에서 세한도를 가지고 오고 싶어

후지스카 치카시를 매일 찾아가서 졸랐다고 한다.

결국 손재형 선생님의 정성에 감복한 후지스카 치카시가 대가 없이 손재형 선생님께 

넘겼는데 그 직후 미군의 폭격으로 후지스카 집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금만 늦었다면 불타 없어질 뻔했다고 한다.

 

유배 중 중국에서 많은 책을 구해준 제자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려준 "세한도"

 

         " 풍사실 "

마음이 넉넉한 선비의 방,

 

평생을 걸쳐 벼루 10개를 밑창을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치열하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했다고 

적혀있다.

 

추사의 흉상 앞에 평소 사랑했던 수선화 화분을 두었다.

 

                " 판전 "

추사 김정희가 노년을 서울 봉은사에 머물며 71세로 별세하기

사흘 전에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위쪽에 있는 둥근 창은 세한도의 집 그림의 만월 창인 거 같다.

만월 창을 통해본 바깥 풍경.

 

전시장에서 올라가는 계단.

특이하게 지그 자그로 만들어져 있다.

계단을 이렇게 만든 이유는 김정희 선생님의 굴곡진 삶의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동상.

 

                          "안거리 "

안채를 안거리라고 하나보다.

 

 

추사 김정희와 초희 선사,

두 분의 우정이 워낙 돈독하여 "금란지교"라고 한다.

초희 선사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와서 6개월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 바깥채 "

사랑채인 거 같다.

귀양을 와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추사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어느덧 종료시간이 되어 직원분이 정낭을 걸고 있다.

 

추사가 유배한 곳에 위리안치가 되어 담장 위에 가시덤불로 덮어져 있다.

귀양 중에 가장 큰 벌이 위리안치인데 

이 위리안치한 이곳에서 8년 3개월을 머무셨다고 한다.

위리안치란

조선시대 죄인을 유배 ( 귀양 ) 보낼 때 집 주위를 가시덤불로 막아놓고

바같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다.

가시가 많은 탱자를 심어 요즘의 철조망 대신으로 해 두었다.

돌담 위에 탱자가 예쁜 꽃을 피어있다.

 

뒤꼍에 돌담이 보이는데 이것은 대정성지이라고 한다.

대정성지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3 읍성 중에 하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