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 어머니, 먼 길 떠나시다. ★

쉰세대 2021. 12. 19. 01:46

2021년 12월 2일,

어머니께서 다시 못 올 먼 길을 홀연히 떠나가셨다.

우리도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여서 아직도 얼떨떨하고 실감이 안 난다.

이 글을 올리는 오늘이 100세 생신인데 생신 17일 앞두고 가셨다.

작년 99세  생신 때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유리창 너머로 인사만 했기에

올해는 만나서 축하해드리고 싶었는데....

 

어머님이 계시던 요양원.

2016년 2월에 요양원에 입주하셔서 다른 요양원에 계시다

이 요양원은 2018년 10월에 입주하셨다.

만 3년을 이곳에서 계셨는데 작년 2월부터는 코로나 때문에 만나뵙지도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셨다.

 

11월 24일 ,

남편이 운동 가는 길에 어머니께 필요한 약을 가지고 요양원에 갔더니

잠시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셨단다.

원장님 말씀이 어머니께서 기침을 하시고 열이 있어서 코로나 검사를 의뢰했는데

내일 결과가 나온다고 한다.

 

11월 25일,

아침에 양성으로 결과가 나왔다며 격리병원으로 이송을 해야 하는데

워낙 고령이시라 보호자가 함께 갈 수 있는 병원으로 갈지 모르니

같이 갈 보호자는 코로나 검사를 하라고 연락이 왔다.

남편이 외출하고 돌아오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강서보건소에서 검사를 하고 왔다.

 

이 요양원은 가톨릭 성도분이 운영하시는데 아주 가족적이라 마음이 놓였던 집인데

이런 일이 생겼다.

우리 어머님이 이 요양원에서 첫 확진자라고 하며

어떤 경로로 병이 옮겨졌는지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한다..

 

11월 26일,

오후 6시에서 9시까지 어머니를 이송할 앰블런스가 온다고 하기에

요양원 앞에서 6시에서 앰블런스 올때 까지 밖에서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찍은 사진들....

 

오후 10시 정각에 앰블런스가 왔다.

앰블런스 내부를 방염천막이 쳐 있다.

 

어머니께서 들것에 실려와서 앰블런스에 실리는데

가까이 접근을 하지못하게 해서 우리는 5m정도 떨어진곳에서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게 없었다.

앰블런스 뒷문이 닫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보낼수 밖에 없어 가슴이 찢어진다.

가까이 가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하직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어머니는 요양병원으로 이송이 되었다.

워낙 고령이라 다음을 기약을 할수 없을거 같은 불길한 생각에

남편도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머님 요양원 계실때 요양보호사님이 찍어준 어머니 모습.

97세때 모습이다.

 

코로나로 판명이 나고 6일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코로나로 돌아가시니 보건소에서 다 알아서 화장하는 시간까지 정해주고

남편과 아들 그리고 조카가 벽제 승화원에 가서 유골함만 받아왔다.

6년전 요양원 직원에게 업혀 집 계단을 내려가신후

한줌의 재가 되어 손자 품에 안겨 집으로 돌아오셨다.

세상에 이렇게 허망할수가....

코로나가 너무 원망스럽다.

 

시어머니께서는 고향에서 사시면서

가시는 집안 어른분들을 꽃상여를 타고 가시는것만 보셨기에

당신도 당연히 꽃상여를 타실줄 아셨는데

상여는 고사하고 자식 손도 못 잡아보고 아무도 임종도 못해드렸고

장례식장도 못 차렸다.

어머니 돌아기실쯤에 하루에 확진자가 7.000명이 넘게 나오니

장례식장도 못 꾸리고 조문객도 맞이할수가 없어 지인들에게도 알리지 안했다.

그야말로 가족장으로 너무 쓸쓸하게 보내드려 죄스러운 마음 이루 말할수가 없다.

 

30여년전에 준비하여 둔 고향 선산 아버님 옆자리에 모셨다.

돌아기실때 입는 수의도 손수 준비해 놓으셨는데

그 수의도 못 입혀드리고 유골함과 함께 묻어 드렸다.

 

경상도 쪽 봉건적 풍습은 장례식 날에는 여자들은 산소에 안 간다.

삼우제날 비로소 여자들이 산소에 갈수가 있다.

삼우제날 사진을 찍었다.

 

 

아버님 산소에 아주 작은 꽃 한송이가 피어있다.

날씨가 아주 포근하고 하늘도 맑다.

 

산소에서 바라본 전망.....

 

 

산소앞에 베롱나무가 아주 큰게 3그루가 있었는데

여름에 그늘이 짙어 잔디가 살지못해 베어내고

이 소나무는 수령이 아주 오래된것이라 베지 말라고 한다.

 

이렇게 어머님의 한 많은 세상을 떠나가셨다.

나는 늘 어머님은 103세까지는 사실거라며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는데

코로나에 이기지 못하고 가셨다.

100세이지만 다른 기저질환도 없고 기억력도 젊은 사람보다 훨씬 좋으셨는데

관절염으로 일어나 걷지를 못하시고 누워만 계셨기에

요양원으로 모실수 밖에 없었다.

이 요양원에서는 일주일에 두번씩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시켜주는데

음성도 또렷하고 온가족들 안부도 물어보시고 고향집 주방에 뭐가 있는지 까지

훤히 기억을 하셨다.

 

어머님은 1922년 음력 동짓달 열엿세에 ( 11월 16일 )

배씨댁 8남매중 세째 따님으로 태어나셔서 18세에 이웃마을에 학자이신

나의 시아버님과 결혼을 하셨는데

어머님이 29세때 아버님께서 3일 편찮으시다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당시는 병원이 가까이 없어 확실한 사인도 모른다고 한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슬하에 3남매를 두셨는데

나의 시숙님이 10살이고 나의남편은 8살이고 시누이는 5살이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장터에도 출입을 한번도 안하시고

살림살이에 필요한 모든것은 머슴을 시켜 장을 봐 왔다고 한다.

이런 어머님이 갑자기 혼자 되셨으니

어린 3남매를 데리고 고생이 얼마나 커셨는지 우리로는 상상이 안 간다.

 어머님이 가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 내가 죽어서 너의 시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그때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리 급하게 죽었냐 "고 물어볼거라고 하셨다.

71년만에 아버님을 만나셨어니 얼굴을 못 알아볼까 걱정이 된다.

 

시인 천상병님은 이 세상에 소풍 오셨다 가신다고 했는데

나의 어머님도 소풍이셨을까?

 

무릎에 관절염이 심해 케토톱을 하루에 8장씩 부치며 사셨는데

이제 관절염으로 아프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편히 계시기를 기원할수 밖에 없다.

 

★ 오늘이 ( 음력 11월 16일) 어머님의 100세 생신이다.

작년 생신때에도 직접 만나지 못하였기에

 올 생신에는 만날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성대하게는 못해도 요양원 선생님들에게 대접을 하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릴려고했는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어머니....

이제 아버님 만나시고 편찮지 마시고 편히 계시길 기원합니다.

 

# 제가 마음이 좀 안정이 될때까지는 답글을 못 쓸거 같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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